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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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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갑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는 등 개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무관직을 사임하고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여 서우학회, 서북학회,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 신민회를 창립하고 1910년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힘썼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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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 (187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갑
현지어 표기李甲
아명이휘선(李彙璿) 또는 이휘선(李徽善)
아호추정(秋汀)
출생일1877년 6월 17일
사망일1917년 6월 13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평원군 (평안남도 숙천군 평원면)
사망지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 주 우수리스크 (니콜리스크)
본관경주 이씨(慶州)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
배우자경주 박씨 부인
자녀이정희(딸)
친척형 2명, 누이 2명, 남동생 1명, 사위 이응준(前 육참총장), 외손자 이창선(육군 중령 예편), 외손서 이형근(前 합참총장)
군사 경력
복무대한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0년 ~ 1907년
최종 계급대한제국 육군 참령
지휘조선 육군 작전장교
주요 참전 전투/전쟁대한제국 조선 고종 황제 폐위 반대 투쟁
정치 활동
정당개화파 후예 출신 신민회 잔존 세력
기타 이력신민회 대표전임위원,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헤이룽장성 무단장 부 무링 현에서 대한국인 국민회 원동지회장으로 재임
훈장
서훈 내역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2. 생애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숙천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1898년 만민공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개화파였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제15기)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무관직을 퇴직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06년 서우학교를,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설하여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 군부 교육국 교무과장 재직 중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황제 폐위 반대 투쟁을 벌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에는 유동설, 김희선, 노백린 등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들과 군대 부활을 위해 노력했다. 1910년 신민회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본관은 경주이다. 아명(兒名)은 '''이휘선'''(李彙璿) 또는 '''이휘선'''(李徽善)이고 호(號)는 추정(秋汀)이다. 평안남도 숙천군 평원면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순안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898년 만민공동회가 개최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한 개화파였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2. 2. 애국계몽운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관직에서 물러나 애국계몽운동 계열에서 활동하였다. 1906년에 서우학회를,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였으며,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1]

2. 3. 독립운동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898년 만민공동회가 개최될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관직에서 물러나 애국계몽운동 계열에서 활동하였다. 1906년 서우학회를,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였으며,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07년 신민회를 창건하고 1910년에는 러시아 영토로 망명하였다. 1907년 군부 교육국 교무과장을 지내던 중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황제 폐위 반대 투쟁을 벌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 유동설, 김희선, 노백린 등과 함께 군대 부활을 위해 노력했다.[1]

1910년에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망명하여 러시아 외교관, 정치가들과 교류하며 현지에 한인 청년 양성소를 만드는 등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힘썼으며, 우수리스크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4. 최후

1910년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망명한 이갑은 여러 러시아 외교관, 정치가들과 교류하고 현지에 한인 청년 양성소를 만드는 등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힘쓰다 니콜리스크에서 41세의 나이로 숨졌다.[2]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가족 및 친척 관계



형이 2명, 여동생이 2명, 남동생이 1명 있었다.

참조

[1] 뉴스 1월의 독립운동가 이갑(李甲)선생 http://www.korea.kr/[...] 정책브리핑 2011-12-30
[2] 뉴스 1월의 독립운동가 이갑(李甲)선생 http://www.korea.kr/[...] 정책브리핑 201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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